목요일, 07 2월 2013 16:12

다빈치코드와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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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코드와 성경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다빈치코드는 저자인 댄 브라운에게 엄청난 돈을 벌게 해준 이천만부 이상이 팔린 추리소설입니다. 다른 인기 있는 추리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다빈치코드도 꼬여있는 줄거리들과 비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주된 비밀, 숨겨져 있는 가장 은밀한 비밀은 예수의 실체에 관한 것입니다.

이 소설에 의하면 그리스도에 관하여 우리의 사제들이 가르쳐온 거의 모든 것들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에 관한 비밀이 풀리고 나면 예수는 결혼을 했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예수와 그의 아내인 막달라 마리아에게는 후손이 있었습니다. 그 후 이 후손은 프랑스로 옮겨져서 왕족이 됩니다.

이 소설에 의하면, 예수는 진정으로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예수가 죽은지 수 백 년 후에 교회의 지도자들이 그리스도를 신격화했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다지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선포하고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진실을 감추었습니다.

325년에 모였던 니케아 공의회(교회회의)에서는 예수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성삼위의 두 번째 분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그 순간까지는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 의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예언자… 위대하고 능력 있는 인간이었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라고 다빈치코드의 저자는 말합니다.

댄 브라운의 추리소설은 수백만의 독자를 즐겁게 했고 이제 그 소설의 영화까지도 수백만의 관객들을 즐겁게 할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도 이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면 한 가지 명심 할 것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 허구라는 것입니다. 그 소설은 꾸민 이야기입니다. 그 영화는 꾸민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댄 브라운은 “이 소설의 모든 기록과…서류는…정확하다”고 하며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다빈치코드는 단순히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돈을 벌려는 목적만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이나 기독교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수에 관한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조장하고 있으며, 그것은 오랫동안 크리스쳔들이 예수에 관하여 믿어왔던 것들에 대한 집요한 공격입니다.

예수의 초기의 제자들은 예수를 그저 위대한 인간으로 보았지만 후대의 몇몇 사람들만이 예수를 사람일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 보는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댄 브라운은 주장합니다. 그러나 댄 브라운의 이 생각은 사실과는 정반대입니다. 성경은 예수가 이 땅에 계셨던 수십 년 동안의 증인들에 의하여 쓰여 졌습니다. 댄 브라운이 언급한 글들은 예수와는 아무런 개인적인 연관이 없는 이상한 부류의 사람들이 먼 훗날 쓴 글들입니다. 예수의 초기의 친구들과 제자들은 자신이 인간이자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듣고 그 주장을 분명하게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나중에 몇몇 사람들이 또 다른 예수를 만들어내어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성경의 사실과는 반대되는 이야기들을 기록했습니다.

만약에 이와 비슷한 소설이 이슬람은 사기이고 코란은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요? 서점은 불에 타고 그 소설의 저자는 목숨의 위협 때문에 피신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그 영화가 무하마드는 이슬람교가 가르쳐 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면 영화관들은 성난 관중들에 의하여 파괴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에 관한 성경의 주장을 비웃으면서 이 소설이 나오자 수백만의 기독교인들과 반신반의하는 기독교인들조차도 이 설익은 생각을 삼켜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서점으로 몰려들었고 영화가 나오자마자 사람들은 항의하는 대신에 신성한 예수에 대한 공격을 즐기기 위하여 돈을 지불하려고 극장의 매표소로 몰려들었습니다.

무하마드를 만화로 그린 것에 격분해서 그 사람을 죽이면 엄청난 액수의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한 몇몇 회교도들의 심리상태도 이해하기가 힘들지만 그러나 그와 정반대로, 크리스쳔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공격을 즐기기 위하여 그 사람들에게 수백만 불의 돈을 지불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예수에 관한 진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그들의 노력에 보상을 하거나 그들의 주장과 생각에 돈을 지불하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닙니다.

다빈치코드라는 소설과 영화로부터 얻는 유익도 있을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관하여 더 열심히 생각할 수 있고 그분의 참된 정체에 관하여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예수의 참된 정체의 의문을 해결하고 싶다면 누군가가 예수에 관하여 말하는 모든 이야기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예수에 관한 터무니없는 이야기들

다빈치코드는 예수에 관하여 언급했던 실제로 존재했던 문서들을 근거로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문서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문서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예수의 시대가 훨씬 지나고 난 뒤의 사람들이 꾸며낸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예수가 오신 후에 오랫동안 예수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생겼습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살아계신 예수를 보고, 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쓰여진 성경의 기록만큼 믿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에 관하여 쓰여진 모든 종류의 이야기들은, 성경에 쓰여진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쓴 이야기까지도 모두가 예수가 흥미진진한 인물이며 사탄은 아주 역동적인 상대역이라고 합니다. 다빈치코드에 언급된 예수의 이야기만이 예수에 관한 유일한 비성경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약이 쓰여지고 나서 1800년 후에 미국인에 의하여 쓰여진 몰몬경은 예수가 미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오셨다고 주장합니다. (이슬람교의)아마디야 교파는 예수가 인도대륙의 카시미르에서 평화롭게 죽었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의 북부지방에는 예수가 묻혀있다고 주장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다음은 오랫동안 일본에 살아온 전세계종교의 전문가인 해롤드 넷랜드가 말하는 일본의 지역 전설입니다.

이스라엘의 북쪽 갈릴리지방에서 성장한 예수는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일본에 왔었다. 그의 나이 33세에 갈릴리로 돌아간 예수는 하늘나라의 왕국 즉 일본에 관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유대인 지도자들과 말썽을 일으키게 되자 그는 갈릴리를 떠나 ‘도와다’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싱고’ 마을로 돌아왔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형제인 이수기리가 예수를 대신하여 십자가형을 받았고 예수는 106세가 되어 죽을 때까지 일본북부지방에서 살았다. 그 동네의 사람들은 예수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묘지를 가리켜준다.

자, 이제 우리가 예수에 관하여 성경이 말하는 것 대신에 그 일본의 지역주민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믿어야합니까? 물론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모두가 다 일세기에 쓰여진 것들입니다. 이 사실은 고대 문헌학자들의 분석으로 증명되었습니다. 가장 회의적인 분석조차도 예수의 생애에 관한 4복음서가 예수를 알았던 사람들의 생전에 쓰여 졌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일본 시골의 이야기는 느닷없이 튀어나온 동네의 전설로서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예수의 이야기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빈치코드에 나오는 예수의 이야기들과 같은 것들은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심각하게 생각할 가치가 전혀 없는 것들입니다.

진짜 예수를 알기 위해서 당신은 누군가가 그분에 관하여 말해주는 모든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믿을 수도 없고, 당신도 예수에 관한 당신만의 이야기를 꾸며낼 수도 없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보고,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인 성경의 이야기에 나오는 증인들로부터 그들이 직접 경험했던 이야기들을 들어야만합니다.

각각 다른 지방의 다른 종교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관하여 자기들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무시하거나 아무것도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수많은 힌두교사당이나 그들의 집에는 예수의 초상이 있습니다. 어떤 힌두 교인들은 예수를 힌두교의 사고방식에 맞추어 예수가 스스로 선포하신 오직 한분뿐이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라 수백만의 힌두의 신들 중의 하나라고 구체화시키기도 합니다. 달라이라마와 같은 불교신자들은 예수가 우리의 죄를 인하여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시사 우리도 죽지 않을 부활의 몸을 받을 수 있게 해주신 구세주가 아니라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려는 보살로 생각합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일어 난지 수세기후에 쓰여진 이슬람교의 문헌에는 예수는 자신을 신이라고 말하지도 않았고 실제로는 십자가 위에서 죽지도 않았으며 그 대신에 바로 하늘로 올라갔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가 죽는 것을 보았고, 신약성경의 복음서에 그것을 기록했으며, 1세기에 로마의 역사가들도 예수의 죽음을 인정했습니다. 다양한 종교들이 예수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와 예수의 정체와 중요성에 관한 그들의 견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동년배 사람들을 포함해서 성경만이 그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고 그분이 행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묻겠습니다. 어느 베스트셀러가 신비하고 오랫동안 감추어진 비밀을 좇아서 예수에 관한 진실을 보여 줍니까? 그것은 다빈치코드가 아니라 성경입니다.

믿을 수 있는 출처

성경의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가장 친한 친구이며 가장 아끼는 제자에 의하여 쓰여 졌습니다. 요한은 책을 팔아서 돈을 벌려고 하는 소설가가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개인적으로 예수를 알고 있었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으며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고 다른 사람들도 그 사실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요한복음 20:31이 이 복음서의 주된 목적을 설명해줍니다: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다빈치코드에 나오는 예수에 관한 댄 브라운의 터무니없는 이야기와는 대조적으로 예수의 가까운 친구들을 포함한 초기의 크리스쳔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독생자로 알고 있었습니다. 3세기 후에 니케아 공의회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선포했을 때 그것은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요한과 예수의 다른 제자들인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그동안 계속 말해온 것들을 다시 말한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배교한 종교지도자인 아리우스가 꾸며낸 거짓사상에 맞서기 위하여 공의회는 예수의 신성과 삼위일체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실히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한 것은 삼 백년후의 니케아 공의회 뿐만이 아닙니다. 4복음서 모두가 예수가 하신 말씀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고 예수가 행하신 일들이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일들임을 보여줍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요20:28)이라고 부르는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증인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면 당신은 언제든지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신약성경을 거부 할 수도 있고 오래 지난 후에 쓰여진 이야기들과 사상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또 다빈치코드와 같은 소설을 당신만의 생각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에 관해서 당신이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예수에 관한 진실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의 죄 값을 치루기 위하여 대속물로서 죽으셨고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죽음을 물리치시고 영광으로 다시 가셨습니다. 다빈치코드가 예수의 아내라고 단언한 여인인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귀신에 사로잡힌 그녀를 귀신으로부터 구해주었다는 것이 성경적인 진실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를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 그녀의 구세주요 친구로서 사랑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를 처음 본 사람 이지만 그러나 결코 그의 아이를 가지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당신이 혼자만의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어떠한 이야기든지 꾸며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이단도 예수를 변하게 할 수 없고 어느 인기 있는 소설도 진리를 바꿀 수 없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작가입니다. 요한은 예수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복음서로 기록했고 그 당시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던 예수에 관한 잘못된 생각들을 반박하고 크리스쳔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편지들을 썼습니다. 맨 처음 편지에서 요한은 예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기꾼들과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강조 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가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요한의 친구인 베드로도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는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1:16). 자신들이 직접 경험한 것들을 말하는 증인들은 믿을만한 사람들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예수에 관하여 자기들이 기록한 모든 것들을 완전히 믿을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의 영감과 인도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비밀을 꾸며내고 그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은 흔히 교회가 우리에게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실체가 여러 사람의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은 교회가 그에 관한 진실을 숨기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을 찾아 나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이 예수에 관한 수수께끼를 너무 많이 공부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주의 비밀에 대하여 눈을 감고 귀를 닫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들이 역사를 너무 많이 거슬러 올라갔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거슬러 올라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실체를 발견하기 위하여 교회의 공의회가 열리기 전으로, 신조들이 만들어지기 전으로 되돌아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궁극적인 예수의 비밀을 발견하기 위하여 그보다도 훨씬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갑니다. 요한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예수의 행함을 보고, 들은 것뿐만이 아니라 그보다도 훨씬 더 멀리 갑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요한은 가장 오래된 역사가 보여줄 수 있는 비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훨씬 뛰어 넘는 곳까지 거슬러갑니다. 요한의 복음서는 모든 세대를 멀리멀리 건너뛰어서 태초부터 시작됩니다. 요한복음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14).

시간과 공간이 생기려고 할 때에, 즉 모든 것이 시작할 때에 누군가가 이미 그곳에 있던 “말씀”을 불렀습니다. 말씀은 결코 시작하지 않았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단순히 있었고, 있고, 또 언제나 있을 것입니다. 이 성스러운 분은 인간의 본성을 가진 자신과 함께하자고 말씀을 불렀고 우리가 아는 예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기예수가 구유에 낳았을 때 또는 아이가 마리아의 태속에 처음 생겼을 때 말씀이 존재하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의 인간으로서의 삶의 시작이었지 신으로서의 삶의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성스러운 말씀은 전혀 시작이 없습니다. 말씀이라고 불리우는 이분은 모든 세대와 모든 세상의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실제로, 말씀이라고 불리우는 이분은 하나님 자신이었고 아기예수로서 이 세상에 오신 분은 바로 이 하나님, 이 성스러운 분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에 관한 제일 중요한 궁극적인 비밀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축복받은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이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들이신 하나님, 언제나 아버지이신 하나님, 언제나 하나님 자신, 언제나 똑같은 아버지로서의 존재, 언제나 끝없는 사랑 안에서 아버지에게 연합하여 있습니다. 인간의 아들이 되는 것과는 달리 성스러운 아들이 되는 것은 어느 한 시점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또 그 아버지의 아주 작은 것으로 시작해서 아버지와 같이 될 때까지 장성해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 아들은 언제나 “장성한” 신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아버지의 완전한 형상을 가지고 있고, 그 아들의 신령한 것들은 영원히 아버지의 신령한 것들에서 비롯됩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태어났을 때, 그것은 아들이 처음으로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원히 존재하는 아들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도록 이 땅에 보내셨고 인간의 본성을 영원히 존재하는 신성에 결부시키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흔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만, 이곳 요한복음의 시작은 그를 말씀이라고 부릅니다. 크리스쳔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성경을 의미합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더 높은 수준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보다도 훨씬 더 위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들을 인간의 언어로 써놓은 책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고 성스러운 그분입니다. 쓰여진 말씀인 성경의 가장 주된 중요함은 그것이 살아계시는 말씀인 예수를 나타내 보이는데 있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신의 표현입니다. 이 성스러운 말씀은 소리나 몇 개의 음절이 아니라 바로 마음, 개성, 아버지로서의 존재이며 실제로 살아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분 자신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이 만드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인격이며 온전한 사랑과 조화 가운데에서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다시 아버지에게로 되돌아가는 자기의 표현입니다.

우주의 논리와 생명

이 살아있는 말씀 ― 원래의 그리이스 말로는 로고스 ― 이 로고스는 우주의 원형을 만들고 존재하도록 한 논리이자 진수입니다. 말씀 자체는 시작이 없습니다. 만물은 그분을 통하여 시작 되었습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2-4). 태초부터 말씀은 논리였으며, 그 계획의 기본이었고, 목적이었고, 운명이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태초부터 우주의 생명이었고, 힘이었으며, 열심의 대상이었고, 미와 사랑이었으며, 우주의 전부였습니다.

성경의 맨 처음 구절인 창세기 1:1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어떻게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창조했을까요? 그분의 말씀으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있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살아있는 말씀이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모든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시편 33:6은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또 시편 148:5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가 명하시매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고대의 그리이스 사람들은 하나의 거대한 정신과 논리인 로고스가 모든 것의 형태와 원형을 만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유대인들은 그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 이 우주의 지혜는 단순히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요한의 복음서는 그것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보다 못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약에 피조물이 구원을 받아야할 필요가 있다면 오직 그 존재와 생명의 본래의 근원만이 그것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성스러운 말씀이자 신성의 두 번째 분께서는 예수라는 인간 안에 자신을 창조함으로서 이 일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만물은 말씀, 아기예수로서 인간의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지혜와 우주의 논리가 예수의 신성이고 예수가 없이는 모든 것이 어리석고 혼란에 빠집니다. 우주의 생명이 예수의 신성인데 예수가 없이는 모든 것이 죽음과 부패입니다. 예수는 세상의 빛이고 그가 없이는 모든 것이 암흑입니다. 요한의 복음서는 말합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하나님의 아들은 언제나 자신의 피조물 안에 계셨지만 인간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죄악에 빠지자 세상은 더 이상 자신의 창조주를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가버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신성의 임재에 대하여 맹목이 되었고 자신들 입맛에 맞는 온갖 종류의 종교들을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빛은 계속 빛나고 있어도 어두움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또한 어두움이 빛을 이기고 그것을 꺼버릴 수도 없습니다.

이 모든 흑암의 세계로부터 하나님은 특별히 한 민족 ― 이스라엘 민족을 뽑아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맺었고, 그들에게 선지자들을 보냈으며, 그들을 자신의 분신같이 대했습니다. 나중에 아들이신 하나님이 육신이 되셔서 자신이 선택한 백성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백성들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를 경멸하고 거부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그 밤에 아기예수는 누구도 그를 위하여 방을 마련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짐승들과 함께 구유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나중에 예수는 자기가 구원하려고 온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하여 고문당하고 십자가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어떻게 세상이 하나님의 빛에 눈이 멀고 그가 오셨을 때 어떻게 그자신의 백성들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를 말하고 나서 요한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니라”(요1:12-13).

예수 혼자만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수수께끼 같은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예수는 자기혼자만 하나님의 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를 원하였고 자신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난 자들이 되기를 원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서 낳음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낳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로부터 낳음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그저 그분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분의 이름으로 믿으십시오. 아들의 이름으로, 구세주의 이름으로,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의 이름으로 믿으십시오.

만약에 제가 예수의 신성에 관하여 말한 것들을 당신이 온전히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해도 괜찮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그분의 생명과 빛 안에서 난 자가 되는지를 당신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이 모든 수수께끼들은 우리중의 누구도 충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믿고 즐거워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것들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십시오. 하나님께로, 그리고 구원으로 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는 살아있는 말씀이요, 로고스이며, 피조물의 지혜요, 논리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예수를 거부하면 당신은 어리석음과 무의미함 속으로 빠지게 됩니다. 예수는 하늘나라의 빛이요 생명입니다. 따라서 그와 떨어져 나오면 거기에는 오직 지옥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외에 구원에 이르는 길을 더 많이 마련했어야한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예수는 구원입니다. 예수는 생명입니다. 예수는 빛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입니다. 예수가 아닌 다른 어느 곳으로나 인도하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하나님에게로 가지 않습니다. 주는 자기 자신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못합니다. 당신은 그를 그 자신으로 받아들이던지 또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던지 둘 중에 하나만을 택해야합니다. 요한일서 5:12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우리 스스로는 우리 자신을 우주의 논리와 생명에 연결시키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우리에게 내려왔습니다. 우리가 그와 같이 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우리와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암흑가운데에서 만질 수가 없었던 영원한 진리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거하시매 아무라도 볼 수가 있게 되었고, 아무라도 들을 수 있는 말하시는 말씀이 되었고, 누구라도 존경할 수 있는 행하는 기적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 생명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죄와 죽음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육신이 되신 영원한 말씀입니다. 그 밖의 다른 말을 해대는 그 어느 소설이나 영화나 종교에 빠지지 말기를 바랍니다. 만약에 다빈치코드와 성경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성경을 믿으십시오. 만약에 예수에 관한 다른 종교의 관점과 예수의 행적을 직접 보고 기록해 놓은 성경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면 성경을 믿으십시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라고 말씀하신 예수를 믿으십시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친구들에게 말씀하신 그분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예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십시오.

데이빗 훼데스 목사

북미주 개혁장로회

번역제공:

선한목자교회

(담임 박장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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